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고트 왕국 (문단 편집) ==== [[알라리크]]의 여정 ====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의 유력한 가문인 발티(Balti) 가문 출신으로, 젊을 때부터 로마군에 종군하면서 상당한 역량을 발휘했다. 394년 [[프리기두스 전투]] 때 2,000명의 서고트족을 이끌고 서로마 황제 [[에우게니우스]]와 권신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의 서로마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로마 제국을 통합했으나, 395년 초 [[부종]]으로 사망했다. 이후 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다스리는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할되었다. 두 황제 모두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법률가이자 재상 루피누스가 섭정을 맡았고, 서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최측근 무장이었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섭정했다. 알라리크는 제국의 정규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루피누스에게 거부당하자 반감을 품었다. 마침 동족들이 루피누스의 잦은 보조금 미지급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알라리크는 이들의 지도자가 되어 왕을 칭했다. 알라리크는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까지 진격했지만, 탄탄한 방어력을 갖춘 그곳을 공격하진 않고 그리스로 진격했다. 테르모필레를 돌파한 알라리크는 그리스 전역을 휩쓸면서 동로마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때 아르카디우스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스틸리코가 그리스에 상륙하여 알라리크를 저지했다. 루피누스는 스틸리코에게 군대를 넘기고 돌아가게 했지만, 스틸리코가 넘긴 군대에 의해 살해당하고 환관 에우트로피우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휩싸이자, 알라리크는 이 기회를 틈타 그리스로 재진격, 아테네, 아티카, 스파르타, 코린트를 위시해 고대 지중해 문명의 중심지로 알려진 여러 도시를 휩쓸면서 '정복자'라고 자처했다. 그러나 397년 스틸리코가 재차 그리스로 진격해 알라리크를 폴로이 일대에서 포위했다. 자칫하면 섬멸당할 뻔한 위기였지만, 스틸리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철수한 덕분에 포위망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코린트 해안을 거쳐 에페이로스 일대로 진격했다. 이후 동로마 궁정과 협상한 결과 일리리쿰 일대의 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알라리크는 일리리쿰 군 사령관으로서의 직책을 잘 활용해 동로마 제국의 병기창을 마음껏 가동하여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을 끌여들어 병력을 증강했다. 401년, 그는 마침내 이탈리아 침공을 결심했다. 우선 동고트족 지도자 라다가이소와 동맹을 맺고 갈리아를 먼저 침공하게 했다. 스틸리코가 야전군을 이끌고 라다가이소를 상대하러 간 사이, 알라리크는 곧바로 북이탈리아로 진입해 호노리우스 황제가 머물고 있던 밀라노 인근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스틸리코가 라다가이소의 무리를 섬멸하고 한 겨울의 강행군을 감행해 밀라노로 귀환했고, 플렌티아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알라리크의 군대를 대파했다. 알라리크는 일단 물러섰다가 다른 게르만 부족들과 연합하여 군세를 회복한 후, 스틸리코에게 화의를 청하고 퇴각해 그를 방심시켜 놓은 후 이탈리아를 재침하려 했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이를 간파해 알라리크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비밀리에 추격했다. 그리하여 403년 초 베로나 근교에서 스틸리코에게 또다시 참패했고, 알라리크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일리리쿰으로 물러났다. 그 후 일리쿰에서 병력 회복에 힘을 기울이던 알라리크는 408년 서로마 제국의 동맹자가 되기를 청하면서 그 대가로 금 4,000 파운드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스틸리코는 라인 강을 비롯한 각 전선에서 증대되는 게르만족의 압박을 타개하려면 알라리크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408년 8월, 서로마 제국에서 정변이 일어나 스틸리코가 반역죄로 처형되고 스틸리코를 따르던 게르만 출신 장성과 가족들이 모조리 학살당했다. 이에 로마군 내 게르만 외원군(포이데라티)는 이탈리아를 떠나 알라리크에게 귀순했는데, 그 수가 3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병력 재건을 완료한 알라리크는 친구이자 동맹자인 스틸리코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탈리아를 전격 침공해 408년 9월 로마를 포위했다. 호노리우스는 이를 막을 병력이 없어서 라벤나에서 수수방관했고, [[로마 원로원]]은 알라리크와 협상한 끝에 포위를 풀고 로마의 동맹자가 되는 대가로 금 5,000파운드, 은 30,000파운드, 향료 3,000파운드, 비단옷 4,000벌, 주홍빛으로 염색한 가죽 3,000벌을 바쳤다. 또한 알라리크는 호노리우스에게 물러나는 조건으로 부족민들을 도나우 강 남안과 베네치아 해안에 이르는 영토에 정착시키는 걸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호노리우스는 동로마 제국에서 보낸 원군이 라벤나에 입성하자 안심하고 알라리크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더해 군대를 파견해 고트군의 후미를 치게 했다. 알라리크는 로마군을 가볍게 격파한 뒤 409년 로마로 재포위했다. 그는 호노리우스를 좀더 압박하기로 마음먹고, 원로원을 압박하여 로마 시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치안 장관)이었던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새 황제로 내세웠다. 하지만 로마 시민들이 별로 호응하지 않았고, 호노리우스가 끝까지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서 로마로 들어가던 곡물을 함대로 차단하기까지 하자, 결국 알라리크는 410년 아탈루스를 폐위하고 황제의 의복을 벗겨서 호노리우스가 있는 라벤나로 보내 협상을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 호노리우스와 알라리크는 라벤나에서 12km 떨어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호노리우스가 일방적으로 협상을 깨고 사루스를 시켜 알라리크를 급습하게 했다. 알라리크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뒤, 더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로마 약탈(410년)|로마 약탈]]을 감행하여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비롯하여 역대 황제의 무덤을 [[도굴]]하고 많은 재물을 약탈한 뒤, 아탈루스, [[갈라 플라키디아]] 등 주요 인사들을 포로로 삼아 끌고 갔다. 알라리크는 여세를 몰아 [[아피아 가도]]를 따라 캄파니아로 이동하여 [[시칠리아]]로 가려 했지만, 함대가 폭풍우로 침몰하면서 실패했다. 이에 작전을 중단하고 북상하던 중 병에 걸려 코센차에서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부족민들에게 안전한 땅을 찾아 주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